김 호 재 (b. 1993)

“맨메이드 선셋”

EN/KO


Released on 8 Sep 2023
Featured in e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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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재는 한국에서 태어나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작가로, 2016년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RISD) 졸업 후 뉴욕에서 활발한 전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3D 모델링과 잉크젯 트랜스퍼 기법을 통해 세밀한 드로잉 단계를 거치는 작업 방식은 회화의 한계에 도전하는 듯한 생생하고 입체적인 공간감을 구현해낸다. 치밀한 구성을 바탕으로 옮겨진 배경 위에는 어딘지 모르게  생경하고 공허한 풍경과 인물이 등장한다. 이번 프리즈 서울 기간에 맞추어 한국에서의 첫 단체전에 참여하게 된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뉴욕과 로스 앤젤레스, 대만 등에서 전시를 앞둔 그는 뉴욕 하퍼스 첼시(2023); 파리 포브루 갤러리 75(2022); 뉴욕 소더비 인스티튜트(2018) 등을 통해 작업을 선보인 바가 있다. 그의 작품은 모건 스탠리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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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어떤 식으로 기록을 하고 화면에 옮기는지 궁금해요.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을 때면 그 자리에서 볼펜으로 간단한 드로잉과 스케치 작업을 한 후에 참고용 이미지들로 사용해요. 만약 그 아이디어가 발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면 명암을 덧대는 등 빈 공간을 채우죠. 현재는 11월에 로스 앤젤레스에서 열릴 개인전을 준비 중인데요, 그 때 공개될 신작들은 제가 직접 쓴 단편소설을 기반으로 한 작업들이에요. 각 회화는 소설 속의 한 장면에 상응해 전체 내러티브의 일부를 구성하는 셈이죠.

                                  
평소에 독서를 즐겨한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글을 쓰시는 건 처음 알았네요. 글을 쓰는 행위가 작가로서 회화를 접근하는 시선이나 방식에도 영향이 있었나요?

네, 그럼요. 저는 회화가 전시라는 하나의 거시적인 맥락 속에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많이 고민해요. 한 점의 작품일지라도 마치 여러 점이 모여있을 때와 같은 다층적인 의미를 전달하길 원하거든요. 전시라는 맥락에서 동떨어진 개별 작업은 제가 추구하는, 일종의 스토리와 같은 서사를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한 시리즈에 해당하는 작업들이 모두 한 데 모였을 때 유기적인 서사를 형성해내는 것을 좋아해요. 음악으로 따지자면 마치 악장들이 모여 하나의 교향곡을 완성해내는 것처럼요.


개별적인 작업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한 뒤 이후에 하나의 연작으로 묶거나 타의적으로 평론가 등에 의해 유형화되는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있죠. 작가님의 이전 시리즈인 <Butterfly Dream>(2021), <Homunculus>(2021-22), <Machines>(2019-21),  <Purgatory>(2021-22), 그리고 최근작인 <Carousel>(2023)에 이르기까지, 작가님은 모두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처음부터 접근하신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아요. 저는 글을 쓰듯이 작업을 해요. 제가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을 보면 결국 나타내고자 하는 이야기는 비슷하지만 각 글에 담긴 스토리라인이나 인물들은 다르잖아요. 저는 오랫동안 ‘사이의 공간(in-between’), 혹은 제 3의 공간 (liminal space)이라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어요. 그리고 그 수단으로 단테의 <신곡>의 한 챕터인 ‘연옥(Purgatorio)’을 선택했고, 지금까지 저의 전 작업들의 거시적인 주제가 되어왔어요. 단죄를 받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인 이곳에서 연상되는 기다림과 공허함 등이 인상 깊었다랄까요. 이처럼 하나의 큰 틀 아래, 개별 회화들이 촘촘한 구성 아래 동일한 주제로 귀결되는 방식으로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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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칠하기 전에 사전 밑그림을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통해 굉장히 세밀하게 컴퓨터로 작업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해당 방식을 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택하게 된 데에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초기 르네상스 작가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의 영향이 매우 컸어요. 컴퓨터를 통한 세밀한 작업은 마치 그가 공간의 구축이나 인물의 형상을 그려낼 때 구현한 완벽한 정확도를 저로 하여금 유사하게 실현할 수 있게 해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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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작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은데요, <Theater Seats>(2016-2017)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으로 연상되는 제목과 달리, 텅 빈 공간이 담긴 작업이네요. 인물이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는  <Purgatory>나  <Carousel> 시리즈와는 구분되기도 하고요. 현재 작업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작업인가요? 이후 작업 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나요?

<Theater Seats>은 학부 재학 당시 제작된 작품인데요,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처음 시도한 작품이기도 해요. 프로그램을 통해 세밀한 공간을 구축해내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성공했는데, 그 다음에는 디지털에서 구축한 공간을 어떻게 실물화 해낼 것인가가 문제더라고요. 그 때 떠오른 방법이 바로 중세시대의 프레스코 기법입니다. 프레스코 벽화를 만들 때는 기법상 석회벽의 건조가 채 완료되지 않았을 때 빠르게 색을 칠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허용되는 시간이 매우 짧아요. 그러다 보니 당시 장인들은 본인들의 스튜디오에서 실물 크기의 카툰(cartoon)* 렌더링을 제작해, 색을 덧칠하기 직전에 현장으로 가져와 카툰의 윤곽선들을 트랜스퍼(transfer)기법을 통해 벽에 옮겨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러한 방식에 착안하여 이 때부터 잉크젯 트랜스퍼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작업들에 나타나는 회색 톤은 트랜스퍼와 3D 모델링을 가지고 여러 실험들을 거친 것에서 기인한 결과이기도 해요.

*사전 밑그림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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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Theater Seats>에서 인상 깊게 본 또 다른 특징은 의자에 등장하는 그리드 패턴이에요. 이 그리드는 이후 <Laundry Day>(2020), <Lifeboat Simulation>(2020), <Actor>(2021), 그리고  <Day 3: Janitor>(2022) 등 상당수의 작업들에서 타일과 같은 형태로 등장하는데요, 오로지 공간감을 형성하기 위한 배경적 요소로 차용한 패턴인가요? 아니면 다른 상징적인 의미가 있나요?

그리드는 ‘연옥’을 공간으로서 회화에 구현하기 위한 기하학적 요소로 선택한 이유가 커요. 그와 더불어 개인적인 이유도 있는데요, 작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 오랫동안 레스토랑 매니저로 일을 했었어요. 당시 일하던 레스토랑에 화장실이 하나가 있었는데, 직업 특성상 눈코 뜰새 없이 바쁜 날이 부지기수였어요. 유일하게 온전히 혼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사방이 그리드 타일로 꽉 채워진 화장실이었어요. 때로는 쉼터이자 다음 근무를 위한 기다림의 공간이 되어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디인지 모르게 폐쇄적인, 갑갑함을 야기하는 공간이기도 했어요. 그 때의 기억에서 영감을 받은 요소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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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자연에 있는 숭고한 순간들을 종종 떠올려요. 숭고한 순간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자연스레 해안가에서의 일출이나 일몰, 혹은 요즘 말로 ‘불멍’이라고 하는 순간들이 환기되어요. 저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순간이나 개념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사람의 인종이나 자라온 문화권, 성장 배경 등에 의한 미세한 디테일은 다를 수 있어도 말이죠. 저에게는 그 순간은 주로 ‘빛’과 관련 있어요. 작업을 할 때 빛은 단순히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게 도와줘요. 빛이 없다면 있는 그대로의 사물만 그려내면 될 것을, 빛을 표현하기 위해 명암을 덧 대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올해 5월, 뉴욕 하퍼스 첼시(Harper’s Chelsea)에서 개최된 ⟪Carousel⟫(2023)에서도 그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밤에 회전목마를 본 적이 있으세요? 회전목마에 빛이 떨어지는 양상, 장난감 말들이 회전하는 모습, 주위에서 흘러나오는 축제 음악, 이 모든 게 합쳐져서 저에게는 마치 사람이 만들어낸 노을 같은 느낌이 든다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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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이 포착하고자 하는 숭고의 감정이 추상적인 개념인 점에 반해 작가님의 화면에는 굉장히 구체적인 공간과 인물들이 등장을 해요. 추상적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소위 말하는 직관과 감각에 의한 제스처보다는 구체적인 형상을 택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제가 생각하는 시각예술의 효용성(utility)은 가독성(legibility)과 접근성으로 연결돼요. 연옥이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가 알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택한 것도 비슷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고요. 작가로서의 제 능력은 제가 표현하려는 것을 얼마나 시각적으로 알아 볼 수 있게 그려내느냐와 직결된다고 느껴요. 만약 제가 그린 사물이나 인물을 보는 이가 경비원, 차, 허수아비 등의 특정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일종의 성공이에요. 무엇을 그리느냐에만 치중하기보다 어디에 얼마 만큼의 정확도로 대상을 위치시킬 것인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점도 그 때문이죠. 시각적으로 식별 가능한 대상이 회화 속 공간에서 인지 가능한 곳에 위치하게 된다면, 그 대상들 간의 관계도 더 뚜렷해지고, 관람자에게는 그림 속 상황을 더 잘 읽어낼 수 있게 해주니까요. 이처럼 보는 이가 그림 속의 상황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가능해졌을 때 비로소 작품과의 심층적인 대화가 가능해진다고 믿어요.


김호재의 더 많은 작업은 9월 1일부터 9일까지 송원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단체전 ⟪Briefly Gorgeous⟫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자세한 정보는 다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phillips.com/store/briefly-gorge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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