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은 실 (b. 1983)

“중첩된 자아”


EN/KO

Released on 8 Sep 2023 
Featured in e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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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실은 인간의 욕망을 가감 없이 동물적으로 표현한 한국화를 통해 큰 주목을 받아왔다. 동양화 전공을 기반으로 한 그의 작업은 서울 P21(2022); 서울 유아트스페이스(2019); 서울 송은 아트스페이스 (2019); 뉴욕 두산갤러리(2016); 서울 리움미술관 (2014); 서울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2010); 서울 대안공간 풀(2009) 등을 통해 보여진 바가 있다. 최근에는 차원, 현대인의 다양한 정신 질환 등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발한 작업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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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2년 작가님이 참여한 일민미술관에서의 단체전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90년대생 후배 한국화 작가들의 작업들이 함께 전시되었는데, 후배들의 작업을 어떻게 보셨나요?

이전 세대 작가들보다 더 ‘멋대로,’ 즉 각자의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한국화 내에서 작업 방식과 내용이 다채로워진 것 같아 매우 긍정적으로 보았어요. 장르 안에서 다각화된 양상들이 발전적인 모습으로 많이 뻗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 것 같아요.




2022년, 일민 미술관에서 선보인 신작 <만병의 근원>(2022)과  P21에서 선보인 <엉망이 된 시간, 뒤엉킨 공간>(2022)의 화면 구성이 독특합니다. 작가님이 꾸준히 탐구해온 주제 및 도상(건축 구조, 성기, 폭포의 이미지 등)들의 총합인 것으로 보여요. 이 두 작품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말씀하신 두 작품에서는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현대인의 다양한 정신 질환—스트레스, 불안증, 화병, 조울증, 무기력증, 우울증, 신경쇠약증, 강박증, 다중인격증 등—들을 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정신 질환이 발현되어 해결책을 모르는 채 뒤엉켜 있기도 하고 가정 혹은 개인의 안에서 분출되지 못하고 내재되어 갈등을 형성하는 모습을 여러 도상들로 나타냈습니다. 신체 각 기관들이 와해되어 공중에 떠다니는 형상은 왜곡된 인간상, 고통, 트라우마, 분노 등 복잡한 심리 상황을 묘사한 것이에요.

후미지고 복합적인 상황과 감정을 구체화하여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인간 내면을 심층적으로 바라보고 싶었어요. 뇌의 단면이 잘려져 분해되는 듯한 이미지가 등장하기도 하고요. 화면 곳곳에 나타나는 다른 공간으로의 통로는 그 너머의 어딘가의 존재에 대한 암시예요. 강박이나 정신 분열의 심리 상태가 변형된 건축 구조물로 전이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내밀한 단면을 보여주는 내면화된 건축 공간의 일부는 움직이는 신체의 일부와 유사하게 표현했어요. 완결되지 못한 건축 구조는 완벽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죠.

작가님은 작업 초기부터 꾸준히 장지를 활용한 작업을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장지 위에 작업을 하시는 과정도 궁금합니다.

작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항상 종이를 탐구해 왔어요.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기법이 종이와 잘 맞더라고요. 기법과 표현적인 것에 있어 시도하고 실험해 볼 측면이 아주 많기도 하고, 아직 해보고 싶은 것이 한참 남아있습니다. 다양한 매체가 나오고 있는 현재 미술계에서 누군가는 한 매체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둔하다 할 수 있지만, 아직도 이 매체를 마스터하지 못한 입장에서 작업은 늘 현재진행 중이라고 생각해요. 작업 과정은 장지 위에 밑 색을 올리기 위해 수십번의 채색 과정을 진행하는 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밑바탕을 올리고 그 위에 형상과 도상을 스케치하고 그려요. 주로 얇은 선으로 이미지의 형태가 남게 되면 엷은 채색을 여러 차례 쌓아가며, 장시간에 걸쳐 작업을 진행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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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이 사용하시는 장지와 수묵의 매체적 특성 때문인지, 작품 안에서 등장하는 형상들은 대부분 중첩되어 있고, 투시된 형태로 등장해요. 작가님이 사용하시는 매체와 작품의 구성 간의 상관관계가 있나요? 

차원에 대한 이야기예요. 시각화하기 어려운 4차원, 5차원을 넘어 차원들이 혼재된 상태를 나타낸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접하는 차원에 대한 이미지들도 상상의 결과예요. 차원을 이미지로서 표현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불명확해요. 그렇기에 저만의 상상과 표현을 통해 제가 다루는 매체와 맞닿아 있는 투명성에 집중하여 중첩된 형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중첩은 시간을 쌓아가는 작업 방식과 맥락을 나란히 하고, 욕망으로 인해 자아가 분열되기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의 표현이기도 해요.


초기 작업에서 많이 다루셨던 가부장제, 혹은 전통과 보수성과 관련된 주제에 여전히 관심이 있으신가요?

제가 자라며 받은 교육과 실제 한국 사회의 현실은 꽤나 거리가 있었어요. 그 괴리의 간극 속에서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사회적 구조는 변함없이 견고하고 그런 점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만, 그 관찰의 각도가 변했다랄까요. 이전에는 사회를 관찰하며 그곳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이슈들을 포착하고 드러내고자 했다면 지금은 이런 관심을 토대로 인간의 내면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다시 말해, 이전에는 문제의 현상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현재는 문제의 원인을 알아보려 노력하고 내재적인 부분을 더욱 탐구하는 태도를 갖게 된 것 같아요.


작가님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모티프는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 구조물이에요. 꾸준히 건축물을 탐구하시는 동기가 궁금합니다.

저의 작업의 시작점부터 건축과 공간의 설정이 등장했어요. 원래부터 건축 관련 서적을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화집보다도 건축 자료집 보는 걸 더 좋아했을 정도로 건축에 큰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표현할 때 건축적 구조와 공간이 매개가 되었어요. 초기에는 한국 전통 가옥을 벗어날 수 없는 보수성, 혹은 전근대적인 잔재의 상징으로서 표현하고자 했어요. 은유이자 상징의 대상이었던 셈이죠. 공간과 구조물이 갖고 있는 특징이 사회 구조와 맞닿아 있을 때가 종종 있는데, 이를 발견하게 되면 제 작업에 차용하기도 해요. 최근에는 육안으로 보이는 세상 너머 내면의 세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공간과 건축에 대한 구조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도상과 형상이 없는 작품들도 눈에 띄는데요, 추상과 구상 작업을 하실 때 과정에서 느껴지는 차이가 있으신가요? 

추상 작업을 할 때는 느껴지는 공기, 아우라, 서늘함 등 여러 감각적인 에너지에 집중해서 작업합니다. 형상이 있는 작업과는 다르게, 끝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고민이 많이 되고 때로는  좌초되기도 하지만 나름의 즐거움이 있어요. 구상의 경우, 스케치가 나오기까지 꽤나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보내는데, 구체적 형상이 없는 추상적인 작품들에서 만큼은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과 희열이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집중하려고 해요. 그로 인해 제 자신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화면 내에서의 에너지(기운)의 역동성과 공간감이 주는 영적인 힘에 몰입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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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들 중 일부는 화이트 큐브가 아닌 (일반적인 전시 공간에 비해) 거칠고 생경한 장소들에서 열린 경우들이 많았어요. 특히나 2013년 개최한 개인전은 한 회사의 사무실 공간이었는데요. 전시 장소를 선정하는 기준이 있으신가요?

특별히 의도하진 않았어요. 초반에는 대안 공간에서 전시를 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다만, 2013년 개인전은 특별했어요. 원래 하기로 했던 공간이 취소되어 장소를 직접 섭외해야 했죠. 한 화면 안에 서로 굉장히 이질적인 것들을 배치시키는 작업 방식을 전시 공간에 대입시켜 보았습니다. 작품과는 거리가 먼, 완전히 생경한 장소에서 전시를 하고 싶어 소공동 도심의 전형적인 사무실을 빌려 전시를 하게 되었죠. 당시 정말 저를 아는 사람, 제 작업이 궁금해서 들른 관람객이 대다수였기에 전시장에서 많은 사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많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이은실은 프리즈 서울 2023 기간 중 P21에서 개최한 단체전 ⟪EROS⟫에 참여하고 있다. 전시와 관련된 더 많은 정보는 해당 사이트에서 확인 할 수 있다: https://www.p21.kr/exhibition/E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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