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원의 작업에서는 직물과 사진의 유기적인 관계성이 포착된다. 직물을 손으로 실을 올올이 해체하고 다시 연결하는 작업 방식과 디지털 이미지의 기본 단위인 픽셀과의 만남은 다소 이질적인 두 요소의 결합으로도 느껴진다. 그러나 정승원은 기민한 관찰을 바탕으로, 그 속에서 유사성을 찾아내어 빈 공간, 즉 보이지는 않지만, 물리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어딘가를 차지하고 있는 무언가를 시각적으로 구현해 낸다. 작가 개인의 기억 속 어느 순간을 가리키던 시공간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은 점차 지구와 자연의 시공간으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의 작업은 2023 코벤트리 비엔날레, 코벤트리 (2023); 더 레퍼런스, 서울 (2023); 주영 한국문화원, 런던(2022); 그리고 한미사진미술관, 서울(2021) 등에서 선보여진 바 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 중이다.
한국에서 학부 졸업 후 바로 영국으로 건너 가 쭉 계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유학 생각이 늘 있으셨던 건가요?
벌써 영국에 온 지 7년이 다 되어가요. 한국에서는 학부에서 사진 전공을 했었어요. 사진학과는 보통 4년 과정 중에 첫 2년은 기술과 이론에 집중해서 전문성을 키우는 데 목적을 둔 수업들이 많아요. 사진을 잘 찍기 위한 스킬과 테크닉을 알려주는 커리큘럼이 주를 이루거든요. 물론 기술을 배우는 건 기초를 쌓는 데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저만의 진정한 작업을 할 시간이 짧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졸업이 다가오고 제 작업 세계를 진지하게 구축하려고 하니, 막상 경험 삼을 분모 자체가 작다고 느껴졌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영국으로 이동하면서 작가로서 주위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소재를 선택하는 기준 등에 영향이 있었나요?
저는 새로운 환경이나 장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고 꽤 시간이 많이 드는 편이에요. 익숙한 반경 내에서 (작업을 위한) 스튜디오 하나를 옮겨도 지연의 시간이 오래 걸려요. 특히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상이한 서구권 사회일수록 녹아드는 데 시간이 더 소요되는 것 같아요.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저 자신을 이동하는 과정에서도요.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결국 그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수록 오히려 시공간을 재정립하고, 저 자신을 재정의할 수 있다고 느끼기도 해요. 처음 런던에 왔을 때, 첫 1년간은 그저 주위를 바라보는 데 시간을 많이 쏟았어요. 그게 지연의 시간인 셈이었던 거죠. 변화의 자극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데 1-2년 정도 걸린 듯해요.
주로 관찰의 대상이 무엇이었나요?
건축, 일상의 색감, 사물들의 재료 등 오브제와 관련된 부분에 자연스레 시선이 먼저 가고, 그 후에는 오브제 주변을 둘러싼 사람, 그리고 언어에 시선이 가요. 말할 때 쓰는 언어라기보다 오브제에 대해 해당 문화권의 사람들이 묘사하고 설명하는 문법적인 언어요. 하나의 대상을 묘사해도 수식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국가마다, 문화권마다 다르다고 느껴져서 늘 흥미롭게 관찰하는 지점이기도 해요. 이런 점은 이후에 제 작업의 맥락을 새로운 시선에서 보고 자리 잡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어요. 작업이 관객에게 받아들여지고 보여지는 내러티브를 제가 조금 더 주도적으로 써 내려 갈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과거 다른 매체와 진행하셨던 인터뷰에서 사진에 대한 ‘절망감(frustration)’을 느낀 시기가 있었다고 언급하셨던 걸 본 적이 있어요.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실망감이었나요?
매체에 대한 절망감보다는 사실 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이미지 자체로 훌륭한 작업을 만들어 내서 승부하는 작가들이 많은데 전 그게 잘 안된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저에게 사진은 그 어떠한 매체보다 입체적인 수단인데, 제 작업은 평면적이라고 느껴졌고, 또 제가 말하고 싶은 것들을 완전하게 표현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느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업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게 되었고, 미술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 중에 저의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해 줄 수 있는 게 무얼까 자신에게 질문하게 되었어요.
사진을 전공하셨지만, 사진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사진을 하나의 수단으로써 작업하고 싶으셨다는 뜻이군요. 작가님 작업 전반적으로 사진이 중요한 기초 자료로 쓰이는 것이 보여요. 작업에 활용되는 사진은 주로 직접 촬영하시나요?
대부분 그렇죠. 굳이 작업을 목적으로 촬영한다기보다 일상적으로 핸드폰, 카메라 구분 없이 틈틈이 순간들을 기록해요. 작업 특성이 얼마나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져요. 예를 들어, 저의 할머니를 다룬 <Kyung Ae>(2016)에서는 오래된 앨범에서 발견한 할머니의 사진들과 제가 촬영한 할머니의 개인 소품들을 사용했어요. 반면, <Digital Strata>(2018-19)는 철저히 리서치 베이스 작업이다 보니 온라인이나 서적을 기반으로 한 이미지들을 사용했고요.
<Kyung Ae>는 디지털 픽셀 혹은 그리드를 기본 단위로 하고 기하학적인 느낌이 드는 시리즈들에 비해 작가님과 특히나 개인적으로 가까운 작업처럼 느껴져요. 특히 할머니의 젊은 시절로 보이는 이미지들 위에 수 놓아진 실들의 밀도가 작업마다 다르게 제작된 점이 눈길을 끌어요.
<Kyung Ae>는 저희 할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처음 진단받으셨을 때, 할머니의 인생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작업이에요. 한창 그 병을 조사를 하던 중 인지장애 및 치매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시계 그리기 테스트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테스트가) 시공간 구성 능력 뿐만 아니라, 추상 개념이나 수의 개념 등의 언어 이해 능력, 언어적 기억 등의 인지 기능도 평가할 수 있어서 치매 중증도를 평가하는 보조 수단으로 자주 사용된다고 하더라고요. 병세가 진행될수록 그려내는 시계의 형태가 더욱 흐트러지고 숫자나 시곗바늘의 순서, 위치, 비율을 정확하게 그리는 데 환자가 어려움을 겪어서 그려진 시계의 형태만 보아도 인지 쇠퇴를 감지할 수 있다고 해요.
몇 달에 걸쳐 할머니와 함께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고 음성도 녹음하면서 이 자료들을 어떻게 작업에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둥근 수틀에 시계 형태로 수놓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할머니의 사진 위에 실을 수놓은 건 할머니께서 작업에 직접 참여하실 방법을 고민하다 생각해 낸 방식이에요. 작업 당시, 사진을 할머니께 직접 한 장씩 보여드리며 사진 별로 느껴지는 친밀감에 따라 실의 양을 손으로 쥐어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쥐는 행위 자체에도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인물 사진 외에도, 흘러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할머니가 일과를 빼곡히 기록하신 달력이나 일상에서 사용하시는 소품들을 직접 촬영해 그 위에 빨간 실을 사용하여 수놓기도 했어요. 수 놓는 작업은 모두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 공간에서 완성했어요.
<Kyung Ae>가 한 인물의 개인적인 시공간 개념을 다루었다면 <Bark>(2018)에서부터 점차 자연물의 소재가 작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작업 당시 어떤 변화가 있으셨던 건가요?
<Bark>의 경우 하나의 나무를 오랜 시간에 걸쳐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한 작업이에요. 총 60점 정도로 구성되어 있고요. 당시에 한창 시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던 시기였어요. 시공간의 개념은 흔히 통합되어 다루어지는데, 공간에 대한 개념보다는 오히려 시간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랄까요. 공간 안에 다양한 시간이 교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의 공간에 축적되는 시간을 표현하고 기록하고 싶었어요. 마치 구글맵의 한 좌표 위에서 지나가고 축적되는 다양한 층위의 시간처럼요.
시간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때마침, 굉장히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던 시기였어요. 매일 오가는 길에 나무 하나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을 마주치는 그 나무와 제가 지나다니는 공간에 흥미가 생겼어요. 매일 같이 보게 되는, 별 특별한 것 없는 그곳을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마주해도 자신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또 오랜 시간 동안 한 자리에서 자라고 벗겨지고 휘어지면서 한 해 한 해 나이테를 더해가는 ‘나무’라는 존재가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그렇게 그 나무를 다른 시간, 다른 순간에 걸쳐 촬영하여 기록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된 나무의 표면에 대한, 즉 일종의 스터디와 같은 작업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작업 과정과 소재가 궁금해요. 작가님 작업을 보면 사진 매체의 객관적인 특성이 주관적으로 해체된다는 느낌이 제일 먼저 들어요. 작업을 위한 사진들을 수집하실 때 최대한 (소재와 매체의) 기록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에 주목하시나요?
저에게는 작업의 기본 재료가 사진이에요. 마치 화가가 물감을 짜놓고 작업을 시작하듯이 시작 단계부터 함께 가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요. 그러다 보니 촬영할 때면 자연스레 연출보다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소재를 기록하는 것 자체에 집중해서 수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촬영 대상을 포착할 때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특성 자체를 주목하려고 하고요. 그 이후 작업을 하면서 저의 주관적인 행위들이 개입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촬영한 공간 이미지를 작가만의 장소로 특정 지을 수 없도록 공간 자체의 인상과 질감을 강조 및 확대해서 천에 프린트해요. 작품을 보는 사람들 시선에서 누구나 자신의 공간에 대한 인상이나 기억이 환기될 수 있도록요. 그다음, 실을 한 올 한 올 손으로 직접 뽑아서 부분적으로 해체하는 과정을 거쳐요. 그리고 표면 위에 그 실들을 다시 얹어서 재구성하는 단계를 가집니다.
부분적으로 해체된 천은 자석을 사용해서 새로운 형태로 벽에 설치해요.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설치할 때마다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 가변성이 곧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억의 유약함, 불완전성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서 이런 형태의 설치를 고집하고 있어요.
2018년에 선보이셨던 <Time Grid>는 다른 작업에 비해 사진보다는 설치 작업의 특성과 추상성이 더 두드러지는 작업처럼 느껴져요.
해당 작업을 진행할 당시에, 디지털 사진과 직물이라는 매체 자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라 다른 작업들과 조금 다르게 표현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때 매체를 조사하면서 직물이 얼마나 디지털적인 매체인 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흔히 위빙(weaving), 즉 직조 기술이 굉장히 전통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기술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물론 역사에 있어서는 오래된 기술이 맞지만, 사실 직조기가 작동하는 원리를 보면 그 무엇보다 디지털과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디지털 통신에서 가장 기본적인 정보 단위가 0과 1이 되듯이, 직조기 또한 상하 방향 중 두 가지 옵션 내에서 작동하는 기기거든요. 실제로 자카드 룸(jacquard loom)이라는 18세기부터 사용되던 기기도 초창기 컴퓨터의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해요. 실제로 첫 컴퓨터 작동을 위해 사용된 펀치 카드가 자카드 룸에 사용되는 펀치 카드와 동일하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흔히 아날로그와 결부하여 생각하는 기술이 그 어떤 기술보다 디지털적이고 현대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였어요. 이런 지점들이 작업에 반영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후에 본격적으로 <Digital Strata>를 통해 그런 면을 다루기 전에 앞서, 시공간과 그리드를 소재로 이것저것 실험을 시도했던 작업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시공간을 다루는 <Kyung Ae>에서 자연과 지구의 지질학적 시공간을 다루는 <Memories Full of Forgetting>(2017-18)과 <Digital Strata>에 이르기까지, 작업의 초점이 한 층씩 거시적으로 넓혀지는 느낌이 들어요. 최근에는 환경과 기후 변화에도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계기가 있으셨던 건가요?
한창 렌즈가 확장되던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또 축소되는 시기도 있는 것 같아요. 특히 팬데믹을 겪으며 지난 2-3년 간 한 없이 좁아졌었는데, 요즘은 다시 확장되고 있다고 느껴요.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내면에만 집중한다기보다, 어떻게 보면 양극단으로 보일 수도 있는 개인적인 시공간과 보편적인 시공간에 대해 동시에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때는 개인화, 내면화할 수 없는 거대한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 건 아닐지 스스로 질문하던 시기도 있었어요. 그런데 작업을 진행할수록 창작자 입장에서는 그 과정 자체가 개인적인 시간으로 스며들게 되더라고요. 제 시간이 그대로 녹아드는 것이니까요. 작업마다 소재나 방식에 있어 차이가 있다 보니 거기서 나오는 다양한 시차도 재미있고요.
시간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는 건 우리가 모두 속해있는 ‘삶’이라는 연속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요. 시간에 대한 저의 시선과 해석을 제 작업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주는 것이 작가로서의 제 몫이라고 생각하고요. 요즘에는 생태계(ecology), 환경적 의식(environmental consciousness)에 중점을 두고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어요. 거시적인 자연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작업도 궁극적으로는 저의 이야기를 찾는 과정이 된다고 느껴요. 작업 표면의 이론적 이야기를 넘어 보는 이가 개인적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작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의 작업은 2023 코벤트리 비엔날레, 코벤트리 (2023); 더 레퍼런스, 서울 (2023); 주영 한국문화원, 런던(2022); 그리고 한미사진미술관, 서울(2021) 등에서 선보여진 바 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 중이다.
Swipe to see more images
한국에서 학부 졸업 후 바로 영국으로 건너 가 쭉 계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유학 생각이 늘 있으셨던 건가요?
벌써 영국에 온 지 7년이 다 되어가요. 한국에서는 학부에서 사진 전공을 했었어요. 사진학과는 보통 4년 과정 중에 첫 2년은 기술과 이론에 집중해서 전문성을 키우는 데 목적을 둔 수업들이 많아요. 사진을 잘 찍기 위한 스킬과 테크닉을 알려주는 커리큘럼이 주를 이루거든요. 물론 기술을 배우는 건 기초를 쌓는 데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저만의 진정한 작업을 할 시간이 짧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졸업이 다가오고 제 작업 세계를 진지하게 구축하려고 하니, 막상 경험 삼을 분모 자체가 작다고 느껴졌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영국으로 이동하면서 작가로서 주위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소재를 선택하는 기준 등에 영향이 있었나요?
저는 새로운 환경이나 장소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고 꽤 시간이 많이 드는 편이에요. 익숙한 반경 내에서 (작업을 위한) 스튜디오 하나를 옮겨도 지연의 시간이 오래 걸려요. 특히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상이한 서구권 사회일수록 녹아드는 데 시간이 더 소요되는 것 같아요.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저 자신을 이동하는 과정에서도요.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결국 그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수록 오히려 시공간을 재정립하고, 저 자신을 재정의할 수 있다고 느끼기도 해요. 처음 런던에 왔을 때, 첫 1년간은 그저 주위를 바라보는 데 시간을 많이 쏟았어요. 그게 지연의 시간인 셈이었던 거죠. 변화의 자극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데 1-2년 정도 걸린 듯해요.
주로 관찰의 대상이 무엇이었나요?
건축, 일상의 색감, 사물들의 재료 등 오브제와 관련된 부분에 자연스레 시선이 먼저 가고, 그 후에는 오브제 주변을 둘러싼 사람, 그리고 언어에 시선이 가요. 말할 때 쓰는 언어라기보다 오브제에 대해 해당 문화권의 사람들이 묘사하고 설명하는 문법적인 언어요. 하나의 대상을 묘사해도 수식하고 표현하는 방법이 국가마다, 문화권마다 다르다고 느껴져서 늘 흥미롭게 관찰하는 지점이기도 해요. 이런 점은 이후에 제 작업의 맥락을 새로운 시선에서 보고 자리 잡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어요. 작업이 관객에게 받아들여지고 보여지는 내러티브를 제가 조금 더 주도적으로 써 내려 갈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과거 다른 매체와 진행하셨던 인터뷰에서 사진에 대한 ‘절망감(frustration)’을 느낀 시기가 있었다고 언급하셨던 걸 본 적이 있어요.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실망감이었나요?
매체에 대한 절망감보다는 사실 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이미지 자체로 훌륭한 작업을 만들어 내서 승부하는 작가들이 많은데 전 그게 잘 안된다고 느껴지는 거예요. 저에게 사진은 그 어떠한 매체보다 입체적인 수단인데, 제 작업은 평면적이라고 느껴졌고, 또 제가 말하고 싶은 것들을 완전하게 표현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느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업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게 되었고, 미술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매체 중에 저의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해 줄 수 있는 게 무얼까 자신에게 질문하게 되었어요.
Swipe to see more images
사진을 전공하셨지만, 사진 자체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사진을 하나의 수단으로써 작업하고 싶으셨다는 뜻이군요. 작가님 작업 전반적으로 사진이 중요한 기초 자료로 쓰이는 것이 보여요. 작업에 활용되는 사진은 주로 직접 촬영하시나요?
대부분 그렇죠. 굳이 작업을 목적으로 촬영한다기보다 일상적으로 핸드폰, 카메라 구분 없이 틈틈이 순간들을 기록해요. 작업 특성이 얼마나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져요. 예를 들어, 저의 할머니를 다룬 <Kyung Ae>(2016)에서는 오래된 앨범에서 발견한 할머니의 사진들과 제가 촬영한 할머니의 개인 소품들을 사용했어요. 반면, <Digital Strata>(2018-19)는 철저히 리서치 베이스 작업이다 보니 온라인이나 서적을 기반으로 한 이미지들을 사용했고요.
<Kyung Ae>는 디지털 픽셀 혹은 그리드를 기본 단위로 하고 기하학적인 느낌이 드는 시리즈들에 비해 작가님과 특히나 개인적으로 가까운 작업처럼 느껴져요. 특히 할머니의 젊은 시절로 보이는 이미지들 위에 수 놓아진 실들의 밀도가 작업마다 다르게 제작된 점이 눈길을 끌어요.
<Kyung Ae>는 저희 할머니가 알츠하이머를 처음 진단받으셨을 때, 할머니의 인생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작업이에요. 한창 그 병을 조사를 하던 중 인지장애 및 치매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시계 그리기 테스트에 대해 알게 되었어요. (테스트가) 시공간 구성 능력 뿐만 아니라, 추상 개념이나 수의 개념 등의 언어 이해 능력, 언어적 기억 등의 인지 기능도 평가할 수 있어서 치매 중증도를 평가하는 보조 수단으로 자주 사용된다고 하더라고요. 병세가 진행될수록 그려내는 시계의 형태가 더욱 흐트러지고 숫자나 시곗바늘의 순서, 위치, 비율을 정확하게 그리는 데 환자가 어려움을 겪어서 그려진 시계의 형태만 보아도 인지 쇠퇴를 감지할 수 있다고 해요.
몇 달에 걸쳐 할머니와 함께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고 음성도 녹음하면서 이 자료들을 어떻게 작업에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둥근 수틀에 시계 형태로 수놓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할머니의 사진 위에 실을 수놓은 건 할머니께서 작업에 직접 참여하실 방법을 고민하다 생각해 낸 방식이에요. 작업 당시, 사진을 할머니께 직접 한 장씩 보여드리며 사진 별로 느껴지는 친밀감에 따라 실의 양을 손으로 쥐어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쥐는 행위 자체에도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인물 사진 외에도, 흘러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할머니가 일과를 빼곡히 기록하신 달력이나 일상에서 사용하시는 소품들을 직접 촬영해 그 위에 빨간 실을 사용하여 수놓기도 했어요. 수 놓는 작업은 모두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 공간에서 완성했어요.
Swipe to see more images
<Kyung Ae>가 한 인물의 개인적인 시공간 개념을 다루었다면 <Bark>(2018)에서부터 점차 자연물의 소재가 작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작업 당시 어떤 변화가 있으셨던 건가요?
<Bark>의 경우 하나의 나무를 오랜 시간에 걸쳐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한 작업이에요. 총 60점 정도로 구성되어 있고요. 당시에 한창 시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던 시기였어요. 시공간의 개념은 흔히 통합되어 다루어지는데, 공간에 대한 개념보다는 오히려 시간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랄까요. 공간 안에 다양한 시간이 교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하나의 공간에 축적되는 시간을 표현하고 기록하고 싶었어요. 마치 구글맵의 한 좌표 위에서 지나가고 축적되는 다양한 층위의 시간처럼요.
Swipe to see more images
시간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때마침, 굉장히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던 시기였어요. 매일 오가는 길에 나무 하나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을 마주치는 그 나무와 제가 지나다니는 공간에 흥미가 생겼어요. 매일 같이 보게 되는, 별 특별한 것 없는 그곳을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마주해도 자신과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또 오랜 시간 동안 한 자리에서 자라고 벗겨지고 휘어지면서 한 해 한 해 나이테를 더해가는 ‘나무’라는 존재가 특별하게 다가왔어요. 그렇게 그 나무를 다른 시간, 다른 순간에 걸쳐 촬영하여 기록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된 나무의 표면에 대한, 즉 일종의 스터디와 같은 작업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Swipe to see more images
작업 과정과 소재가 궁금해요. 작가님 작업을 보면 사진 매체의 객관적인 특성이 주관적으로 해체된다는 느낌이 제일 먼저 들어요. 작업을 위한 사진들을 수집하실 때 최대한 (소재와 매체의) 기록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에 주목하시나요?
저에게는 작업의 기본 재료가 사진이에요. 마치 화가가 물감을 짜놓고 작업을 시작하듯이 시작 단계부터 함께 가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요. 그러다 보니 촬영할 때면 자연스레 연출보다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소재를 기록하는 것 자체에 집중해서 수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촬영 대상을 포착할 때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특성 자체를 주목하려고 하고요. 그 이후 작업을 하면서 저의 주관적인 행위들이 개입된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촬영한 공간 이미지를 작가만의 장소로 특정 지을 수 없도록 공간 자체의 인상과 질감을 강조 및 확대해서 천에 프린트해요. 작품을 보는 사람들 시선에서 누구나 자신의 공간에 대한 인상이나 기억이 환기될 수 있도록요. 그다음, 실을 한 올 한 올 손으로 직접 뽑아서 부분적으로 해체하는 과정을 거쳐요. 그리고 표면 위에 그 실들을 다시 얹어서 재구성하는 단계를 가집니다.
부분적으로 해체된 천은 자석을 사용해서 새로운 형태로 벽에 설치해요.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든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설치할 때마다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 가변성이 곧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억의 유약함, 불완전성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서 이런 형태의 설치를 고집하고 있어요.
Swipe to see more images
2018년에 선보이셨던 <Time Grid>는 다른 작업에 비해 사진보다는 설치 작업의 특성과 추상성이 더 두드러지는 작업처럼 느껴져요.
해당 작업을 진행할 당시에, 디지털 사진과 직물이라는 매체 자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라 다른 작업들과 조금 다르게 표현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때 매체를 조사하면서 직물이 얼마나 디지털적인 매체인 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어요. 사람들이 흔히 위빙(weaving), 즉 직조 기술이 굉장히 전통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기술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물론 역사에 있어서는 오래된 기술이 맞지만, 사실 직조기가 작동하는 원리를 보면 그 무엇보다 디지털과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디지털 통신에서 가장 기본적인 정보 단위가 0과 1이 되듯이, 직조기 또한 상하 방향 중 두 가지 옵션 내에서 작동하는 기기거든요. 실제로 자카드 룸(jacquard loom)이라는 18세기부터 사용되던 기기도 초창기 컴퓨터의 어머니라고 부른다고 해요. 실제로 첫 컴퓨터 작동을 위해 사용된 펀치 카드가 자카드 룸에 사용되는 펀치 카드와 동일하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흔히 아날로그와 결부하여 생각하는 기술이 그 어떤 기술보다 디지털적이고 현대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였어요. 이런 지점들이 작업에 반영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후에 본격적으로 <Digital Strata>를 통해 그런 면을 다루기 전에 앞서, 시공간과 그리드를 소재로 이것저것 실험을 시도했던 작업이었습니다.
Swipe to see more images
개인적인 시공간을 다루는 <Kyung Ae>에서 자연과 지구의 지질학적 시공간을 다루는 <Memories Full of Forgetting>(2017-18)과 <Digital Strata>에 이르기까지, 작업의 초점이 한 층씩 거시적으로 넓혀지는 느낌이 들어요. 최근에는 환경과 기후 변화에도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계기가 있으셨던 건가요?
한창 렌즈가 확장되던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또 축소되는 시기도 있는 것 같아요. 특히 팬데믹을 겪으며 지난 2-3년 간 한 없이 좁아졌었는데, 요즘은 다시 확장되고 있다고 느껴요.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내면에만 집중한다기보다, 어떻게 보면 양극단으로 보일 수도 있는 개인적인 시공간과 보편적인 시공간에 대해 동시에 이야기하고 싶어요.
한때는 개인화, 내면화할 수 없는 거대한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작업한다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 건 아닐지 스스로 질문하던 시기도 있었어요. 그런데 작업을 진행할수록 창작자 입장에서는 그 과정 자체가 개인적인 시간으로 스며들게 되더라고요. 제 시간이 그대로 녹아드는 것이니까요. 작업마다 소재나 방식에 있어 차이가 있다 보니 거기서 나오는 다양한 시차도 재미있고요.
시간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는 건 우리가 모두 속해있는 ‘삶’이라는 연속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해요. 시간에 대한 저의 시선과 해석을 제 작업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주는 것이 작가로서의 제 몫이라고 생각하고요. 요즘에는 생태계(ecology), 환경적 의식(environmental consciousness)에 중점을 두고 새로운 작업을 하고 있어요. 거시적인 자연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작업도 궁극적으로는 저의 이야기를 찾는 과정이 된다고 느껴요. 작업 표면의 이론적 이야기를 넘어 보는 이가 개인적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작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 2023 Rad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