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엄유정의 작업들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자연의 요소와 인간, 때로는 사물들을 향한 긴밀하고 섬세한 관찰에서 시작된다. 그는 <Feuilles>(2019-21) 로 2021년 독일 국제 책 디자인 공모전에서 최고상인 ‘골든 레터’상을 수상한 작가로 익히 알려져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래이더는 일상을 둘러싼 애정 어린 그의 시선에 주목하여 식물 작업 너머 보다 다양하고 심층적인 그의 작업 세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그의 작업은 서울 에이라운지(2023); 서울 금호미술관(2023); 서울 학고재 디자인 갤러리(2021);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2019) 등에서 전시된 바가 있다.
작가가 되기 이전의 삶은 어떠셨는지 궁금해요.회화를 전공했던 학부 시절은 어떠셨나요?
전 초등학교 입학도 전, 또렷하게 기억 나지 않을 시기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자연스럽게 늘 화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라왔어요. 대학교 재학 시절, 학교에서는 크게 드로잉에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였던 지라 알게 모르게 갑갑함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 미국 매릴랜드에 위치한 마이카(Maryland Institute College of Art)라는 미대에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작은 드로잉도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구나 느꼈어요. 그 때 드로잉을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주던 교수님 곁에서 전통적인 회화 수업에서 벗어난 강의들을 들으며 더 넓은 세계를 경험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인체 누드 수업을 열심히 수강하며 드로잉 연습을 했던 것이 곧 인체의 다양한 동작들을 아카이빙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인체 작업들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어요.
말씀하신 인체 작업들은 <Relationship>(2012)과 <Body>(2012-2014) 연작을 시작으로 최근 2021년 학고재 디자인 갤러리에서 선보인 <밤-긋기>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여요. 작가님 작업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은 <Iceland>(2014)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특징이 소거된 채 인체만이 부각되는 느낌인데,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Relationship>(2012) 시리즈에서 나타나듯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작업들을 오랫동안 해왔어요. 평소에도 몸의 표정에 대한 아카이브를 지속적으로 쌓는 편인데요, 몸의 동작들이 가지는 뉘앙스를 축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오랜 시간 인체를 그리는 연습을 하면서 눈, 코, 입같은 이목구비를 통해 인간에 대해 알게 되기보다 오히려 손동작, 어깨의 기울기, 발의 동작과 같이 신체의 미세한 제스처들을 통해 다양한 감각들이 만들어진다고 느꼈어요. 그런 지점을 부각하다 보니 의식하지 않은 채 자연스레 얼굴이나 얼굴을 감싼 머리카락, 그 안에 담긴 눈은 없어지고 손발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인체의 형태가 그려졌다고 해야할까요. 인체 형상은 여전히 현재 진행으로 그리는 중인데, 늘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입니다.
대상을 화면에 옮길 때 그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보다는 바디 랭귀지나 전체적인 느낌을 주목한다는 의미일까요?
그 부분은 저 또한 여전히 고민하는 지점인데요, 작업의 주제를 명확히 정해놓고 시작한다기보다 주위의 시각적인 경험들을 다양하게 드로잉과 페인팅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식물이나 자연, 혹은 사물을 대상으로 할 때는 외부의 객관적인 관찰에 초점을 둬요. 하지만 인물을 그릴 때는 객관적인 묘사가 아닌 제가 경험하거나 느낀 감정들, 즉 내재화 된 추상적인 요소들을 인물이라는 형체를 빌려 표현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다시 말해 인체 동작을 이용해 전달하고자 하는 경험적 측면을 묘사한 셈이죠. 개인적인 감각으로 그려지는 부분이 많다 보니, 보는 이들이 (작품을) 구체적인 상황을 유추하거나 특정 키워드로 한정하기 보다 인체의 몸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접근을 해주셨으면 해요.
작업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시리즈 별로 자연, 인물 혹은 사물 등으로 명확히 분류되는 것으로 보여요. 연작 작업을 하실 때 눈길을 끄는 큰 주제를 염두에 두고 시작하시나요?
특별한 주제를 정해서 작업을 시작한다기보다 평상시에 꾸준히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작업이 시작된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아요. 현재 제 삶의 경험과 가장 맞닿아 있고 가까운 것들을 기록하고 관찰한 다음, 그게 시간을 통해 축적되면 시리즈나 카테고리가 돼요. 분류의 편의상 소재들이 인물, 사연, 자연으로 크게 나뉠 수 있지만 저에게는 모두 평등한 대상들이며, 각 소재가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게 되는 유기적인 계기와도 같습니다. 인물 작업을 하다 보면 거기에 쏟은 시간이 인물을 닮은 바위를 찾는 과정이 되기도 하고, 바위를 한참 그리다 보면 인물을 바위처럼 바라보게 된다거나 말이에요. 그리다 보면 결국 서로 모두 닮아있더라고요.
페인팅과 드로잉, 영상을 오가며 작업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각 소재마다 어떤 기준으로 작업 방식을 선택하시나요?
경험하는 풍경이 눈 녹는 설산과 같이 형상이 달라지는 면(plane)이거나 부피감에 대한 작업이라면 페인팅을 택해요. 반면 식물의 선적인 특징이나 구조적인 면을 강조하고 싶을 때는 건재료를 이용한 드로잉으로 시작하고요. 제가 먼저 정하기보다 대상에 따라 저를 바꾸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2021년에 수상하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상과 관련하여 언급을 안할 수가 없어요.당시 상을 받은 <Feuilles>(2019-21)에 대해 간략히 소개 부탁드려요.
해당 작업은 3년정도 축적의 과정을 거친 시리즈에요. 매 순간마다 관찰했던 걸 다른 시기, 다른 장소에서 그린 작업들의 모음입니다. 식물에 관한 여러가지 방면의 스터디랄까요. 해당 시리즈만 보시고 흔히들 제가 식물 작가라고 생각하시기도 하는데요 (웃음). 식물 자체에 대한 전문적인 관심보다는 자연물을 관찰하다 보면 제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구조나 선적인 특성이 있다고 느꼈고, 자연스레 더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었어요. 지금까지 그려왔던 관습적인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도가 될 것 같다고 느껴져 낯선 대상으로서의 식물을 계속 찾아 나섰던 기억이 있습니다.
‘관찰한다’라는 건 꾸준히 하나의 대상을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지켜본다는 의미이실까요? 작가님의 다른 작업에서 등장하는 빙하나 설산처럼 말이에요.
묶음 꽃 시리즈 <Hand-tied Flowers>(2021)나 <셀렘에 대한 스터디>(2021) 에서는 하나의 대상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보기도 했어요. 코로나로 인해 외부와 단절되다 보니 절화를 사서 그리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습니다. 이러한 그리기 방법은 <Tunnel>(2014)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작업하는 데에도 중요한 요소였던 것 같아요. 드로잉 작업의 반복적인 수행이 자연스레 축적되는 과정 자체가 애니메이션을 환기하기도 하고 평면에서 그려내는 시간과 영상에 담기는 시간 간의 비교점이 흥미롭다고 느껴졌거든요. 하나의 그림 안에 그 만의 온전한 시간이 있다면, 연속성을 띠고 시리즈가 되면 그게 전체로서의 또 하나의 시간성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어요. 또 다른 리듬으로 말이죠. 평면 안에서 정지된 시간과는 다른 일루젼 속의 시간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Glenn Gould>(2014)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영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연주 동작을 분절하여 19점의 그림으로 그린 뒤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변환한 작업 방식에서도 시간에 대한 작가님의 관심이 느껴졌어요. 앞에서도 언급하신 회화만이 가진 시간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요?
그림 안의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궁극적으로는 과정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나무 하나를 그려도 마음에 드는 선과 색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수정을 거쳐요. 어느 순간, 작업을 하고 집에 와서 보면 다음 날 또 다른 그림이 되어 있는 걸 보며, 그림에서 완성이라는 건 참 많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무수히 많은 완성 중에 난 하나의 완성을 했을 뿐이구나, 마치 우주의 별처럼 말이죠. 순간에 망쳤다고 생각되어도 그 길로 또 다른 새로운 완성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같아요. 마치 우리 삶이 그런 것처럼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림 안에서의 살아있는 시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프리즈 기간 동안 에이라운지에서는 ≪세 가지 형태≫ 개인전에,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는 ≪파란 얼굴과 검은 작약≫ 단체전에 참여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전시 참여작들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개인전에서는 눈과 수풀, 그리고 돌에 대해서 그렸어요. 식물 작업으로 한창 소개 될 때 이미 고민을 시작했던, 2-3년 정도 생각을 거친 뒤 그린 작업입니다. 2014년 아이슬란드 레지던시 시절 그린 <White mountain>에서 시작된 면에 대한 관심을 더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아라우카리아>는 선적인 특성이 강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리듬과 관련된 느낌들로 작업을 이어 나갔다면 이번에는 여러 대상을 다루는 것 자체를 소재로 했습니다. 각 대상이 명확하게 나타나다기 보다는 눈덩이, 돌덩인, 풀덩이를 뒤섞어본다랄까요. 물론 이 또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작업을 하다보니 형태가 부각되고 단순화되며 각 소재만의 정체성은 흐려졌죠. 예전 작업보다는 (대상이) 무엇인지 다소 알 수 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네요.
엄유정의 개인전 ≪세 가지 형태≫는 2023년 9월 16일까지 에이라운지 갤러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단체전 ≪파란 얼굴과 검은 작약≫은 2023년 월 17일까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더 많은 정보는 다음 사이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A-Lounge Gallery: http://a-lounge.kr/
Space Willing N Dealing: https://www.willingndealing.org/
작가가 되기 이전의 삶은 어떠셨는지 궁금해요.회화를 전공했던 학부 시절은 어떠셨나요?
전 초등학교 입학도 전, 또렷하게 기억 나지 않을 시기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자연스럽게 늘 화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라왔어요. 대학교 재학 시절, 학교에서는 크게 드로잉에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였던 지라 알게 모르게 갑갑함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 미국 매릴랜드에 위치한 마이카(Maryland Institute College of Art)라는 미대에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작은 드로잉도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구나 느꼈어요. 그 때 드로잉을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해주던 교수님 곁에서 전통적인 회화 수업에서 벗어난 강의들을 들으며 더 넓은 세계를 경험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인체 누드 수업을 열심히 수강하며 드로잉 연습을 했던 것이 곧 인체의 다양한 동작들을 아카이빙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인체 작업들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어요.
Swipe to see more images
말씀하신 인체 작업들은 <Relationship>(2012)과 <Body>(2012-2014) 연작을 시작으로 최근 2021년 학고재 디자인 갤러리에서 선보인 <밤-긋기>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여요. 작가님 작업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은 <Iceland>(2014)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특징이 소거된 채 인체만이 부각되는 느낌인데,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Relationship>(2012) 시리즈에서 나타나듯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작업들을 오랫동안 해왔어요. 평소에도 몸의 표정에 대한 아카이브를 지속적으로 쌓는 편인데요, 몸의 동작들이 가지는 뉘앙스를 축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오랜 시간 인체를 그리는 연습을 하면서 눈, 코, 입같은 이목구비를 통해 인간에 대해 알게 되기보다 오히려 손동작, 어깨의 기울기, 발의 동작과 같이 신체의 미세한 제스처들을 통해 다양한 감각들이 만들어진다고 느꼈어요. 그런 지점을 부각하다 보니 의식하지 않은 채 자연스레 얼굴이나 얼굴을 감싼 머리카락, 그 안에 담긴 눈은 없어지고 손발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인체의 형태가 그려졌다고 해야할까요. 인체 형상은 여전히 현재 진행으로 그리는 중인데, 늘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입니다.
Swipe to see more images
대상을 화면에 옮길 때 그 대상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보다는 바디 랭귀지나 전체적인 느낌을 주목한다는 의미일까요?
그 부분은 저 또한 여전히 고민하는 지점인데요, 작업의 주제를 명확히 정해놓고 시작한다기보다 주위의 시각적인 경험들을 다양하게 드로잉과 페인팅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같아요. 식물이나 자연, 혹은 사물을 대상으로 할 때는 외부의 객관적인 관찰에 초점을 둬요. 하지만 인물을 그릴 때는 객관적인 묘사가 아닌 제가 경험하거나 느낀 감정들, 즉 내재화 된 추상적인 요소들을 인물이라는 형체를 빌려 표현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다시 말해 인체 동작을 이용해 전달하고자 하는 경험적 측면을 묘사한 셈이죠. 개인적인 감각으로 그려지는 부분이 많다 보니, 보는 이들이 (작품을) 구체적인 상황을 유추하거나 특정 키워드로 한정하기 보다 인체의 몸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접근을 해주셨으면 해요.
작업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시리즈 별로 자연, 인물 혹은 사물 등으로 명확히 분류되는 것으로 보여요. 연작 작업을 하실 때 눈길을 끄는 큰 주제를 염두에 두고 시작하시나요?
특별한 주제를 정해서 작업을 시작한다기보다 평상시에 꾸준히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작업이 시작된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아요. 현재 제 삶의 경험과 가장 맞닿아 있고 가까운 것들을 기록하고 관찰한 다음, 그게 시간을 통해 축적되면 시리즈나 카테고리가 돼요. 분류의 편의상 소재들이 인물, 사연, 자연으로 크게 나뉠 수 있지만 저에게는 모두 평등한 대상들이며, 각 소재가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게 되는 유기적인 계기와도 같습니다. 인물 작업을 하다 보면 거기에 쏟은 시간이 인물을 닮은 바위를 찾는 과정이 되기도 하고, 바위를 한참 그리다 보면 인물을 바위처럼 바라보게 된다거나 말이에요. 그리다 보면 결국 서로 모두 닮아있더라고요.
Swipe to see more images
페인팅과 드로잉, 영상을 오가며 작업을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각 소재마다 어떤 기준으로 작업 방식을 선택하시나요?
경험하는 풍경이 눈 녹는 설산과 같이 형상이 달라지는 면(plane)이거나 부피감에 대한 작업이라면 페인팅을 택해요. 반면 식물의 선적인 특징이나 구조적인 면을 강조하고 싶을 때는 건재료를 이용한 드로잉으로 시작하고요. 제가 먼저 정하기보다 대상에 따라 저를 바꾸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wipe to see more images
아무래도 2021년에 수상하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상과 관련하여 언급을 안할 수가 없어요.당시 상을 받은 <Feuilles>(2019-21)에 대해 간략히 소개 부탁드려요.
해당 작업은 3년정도 축적의 과정을 거친 시리즈에요. 매 순간마다 관찰했던 걸 다른 시기, 다른 장소에서 그린 작업들의 모음입니다. 식물에 관한 여러가지 방면의 스터디랄까요. 해당 시리즈만 보시고 흔히들 제가 식물 작가라고 생각하시기도 하는데요 (웃음). 식물 자체에 대한 전문적인 관심보다는 자연물을 관찰하다 보면 제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구조나 선적인 특성이 있다고 느꼈고, 자연스레 더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었어요. 지금까지 그려왔던 관습적인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도가 될 것 같다고 느껴져 낯선 대상으로서의 식물을 계속 찾아 나섰던 기억이 있습니다.
Swipe to see more images
‘관찰한다’라는 건 꾸준히 하나의 대상을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지켜본다는 의미이실까요? 작가님의 다른 작업에서 등장하는 빙하나 설산처럼 말이에요.
묶음 꽃 시리즈 <Hand-tied Flowers>(2021)나 <셀렘에 대한 스터디>(2021) 에서는 하나의 대상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보기도 했어요. 코로나로 인해 외부와 단절되다 보니 절화를 사서 그리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습니다. 이러한 그리기 방법은 <Tunnel>(2014)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작업하는 데에도 중요한 요소였던 것 같아요. 드로잉 작업의 반복적인 수행이 자연스레 축적되는 과정 자체가 애니메이션을 환기하기도 하고 평면에서 그려내는 시간과 영상에 담기는 시간 간의 비교점이 흥미롭다고 느껴졌거든요. 하나의 그림 안에 그 만의 온전한 시간이 있다면, 연속성을 띠고 시리즈가 되면 그게 전체로서의 또 하나의 시간성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했어요. 또 다른 리듬으로 말이죠. 평면 안에서 정지된 시간과는 다른 일루젼 속의 시간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Glenn Gould>(2014)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영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연주 동작을 분절하여 19점의 그림으로 그린 뒤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변환한 작업 방식에서도 시간에 대한 작가님의 관심이 느껴졌어요. 앞에서도 언급하신 회화만이 가진 시간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요?
그림 안의 시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궁극적으로는 과정에 대한 것들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나무 하나를 그려도 마음에 드는 선과 색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수정을 거쳐요. 어느 순간, 작업을 하고 집에 와서 보면 다음 날 또 다른 그림이 되어 있는 걸 보며, 그림에서 완성이라는 건 참 많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무수히 많은 완성 중에 난 하나의 완성을 했을 뿐이구나, 마치 우주의 별처럼 말이죠. 순간에 망쳤다고 생각되어도 그 길로 또 다른 새로운 완성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같아요. 마치 우리 삶이 그런 것처럼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림 안에서의 살아있는 시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프리즈 기간 동안 에이라운지에서는 ≪세 가지 형태≫ 개인전에,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는 ≪파란 얼굴과 검은 작약≫ 단체전에 참여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전시 참여작들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개인전에서는 눈과 수풀, 그리고 돌에 대해서 그렸어요. 식물 작업으로 한창 소개 될 때 이미 고민을 시작했던, 2-3년 정도 생각을 거친 뒤 그린 작업입니다. 2014년 아이슬란드 레지던시 시절 그린 <White mountain>에서 시작된 면에 대한 관심을 더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아라우카리아>는 선적인 특성이 강하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리듬과 관련된 느낌들로 작업을 이어 나갔다면 이번에는 여러 대상을 다루는 것 자체를 소재로 했습니다. 각 대상이 명확하게 나타나다기 보다는 눈덩이, 돌덩인, 풀덩이를 뒤섞어본다랄까요. 물론 이 또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작업을 하다보니 형태가 부각되고 단순화되며 각 소재만의 정체성은 흐려졌죠. 예전 작업보다는 (대상이) 무엇인지 다소 알 수 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네요.
엄유정의 개인전 ≪세 가지 형태≫는 2023년 9월 16일까지 에이라운지 갤러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단체전 ≪파란 얼굴과 검은 작약≫은 2023년 월 17일까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더 많은 정보는 다음 사이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A-Lounge Gallery: http://a-lounge.kr/
Space Willing N Dealing: https://www.willingndealing.org/
© 2023 Rad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