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부터 꾸준한 활동을 해온 서용선은 강렬한 원색의 사용과 굵직한 붓질, 그리고 근현대 역사와 신화와 관련된 소재들을 담은 회화들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민족적 비극사나 선사 신화 등이 그동안의 그의 작업 일부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나, 40여 년 간 지속된 그의 작가로서의 여정을 정치적 관점이나 특정한 시기만을 기반으로 묘사하는 것은 자칫 한정된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작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그의 서베이 전시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그의 작업들, 그 중에서도 특히 <도시> 시리즈를 함께 선보이며 작가의 폭 넓은 작업 세계를 조명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래이더는 마침 뉴욕을 방문 중이던 작가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그 결과, 무수히 진화해온 그의 소재들은 제각기 띠고 있는 형상은 다를지 언정, 모두 인간 존재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에 공통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용선의 주요 개인전으로는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서울 아트선재센터, 2023), 《통증·징후·증세: 서용선의 역사 그리기》(파주 아트센터화이트블럭, 2019), 그리고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 유토피즘과 그 현실 사이》(서울 금호미술관/학고재갤러리, 2015) 등이 있다. 그의 작업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그리고 싱가폴 우관중 미술관 등 국내외 유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인터뷰를 위해 연락을 드렸을 때 마침 뉴욕에 계시다고 해서 정말 반가웠어요. 뉴욕에 자주 오시나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여행도 하고 작업도 할 겸 종종 와요. 맨해튼에서 델리를 운영하시는 한국인 분을 우연히 알게 됐는데, 델리 인접한 곳에 있는 여유 공간을 흔쾌히 내주셔서 그곳에서 작업하는 중이에요. 낮에는 주로 할렘 쪽에 있고 저녁에 맨해튼으로 내려와서 지내요. 할렘에서는 때마침 오랫동안 가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인 부부가 작업실을 내어 주셔서요. 치안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미드타운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라 흥미로워요. 낮과 오후 시간대는 주로 그 쪽에서 작업을 하고 저녁에는 도심 쪽으로 내려와서 지내요.
베를린, 뉴욕, 시드니 등 세계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시면서 작업하신 <도시>시리즈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걸로 알고 있는데, 도시에 대한 애정이 아직까지 크신 것 같아요. 작가님 작업들을 보면 거리를 걷고 있는 인물들, 혹은 대중교통을 타고 있는 인물들 등 그 소주제는 다를지 언정 도심 속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네, 전 도시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걸 보는 게 참 즐거워요. 특히 전 대도시 속 삶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요. 뉴욕 맨해튼의 경우는 세계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욱 다양성이 두드러지는 곳이잖아요. 인간, 인종, 민족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일종의 호기심을 주는 곳인 것 같아요.
도시 시리즈에서 가장 먼저 제 눈에 띄는 부분은 색채에요. 익숙하고 평온한 일상의 풍경들이지만 <도시-차 안에서>(1998, 1991)나 <봉천동-사당동>(1995), 최근에 와서는 <34th Street>(2010)이나 <14가 출구>(2010) 에 이르기까지 원색 사용들이 특징적이에요. 붓터치나 인물들의 표정들과도 더해져 전반적으로 강렬하고 러프한 느낌이 든다랄까요. 강한 원색들을 위주로 사용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도시> 시리즈는 80년대 서울에서 처음 시작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인 70년대 후반만 해도 종로 거리에 가면 간판들에 검정색 글씨들이 빼곡했어요. 흑백이 주조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러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컬러가 많이 쓰이기 시작했어요. 그 때부터 컬러 텔레비전이 도입되기 시작했거든요.
오랫동안 한국의 도시들을 관찰하며 느낀 건 한국은 역사적으로 색채 사용에 있어서 보수적인 면이 있다는 점이에요. 몇 백 년 동안 유교 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가며 집단 속에서 (개인이) 돋보이는 게 억제되기도 했고, 서화 역시 먹을 중심으로 발달했잖아요. 유교에서는 수묵 중심의 산수화가 장려되다 보니 단조로운 색채의 사용이 마치 오랜 관습처럼 굳어버린 셈이죠. 제가 학교 다닐 때도 동양화에 밝은 색채를 쓰면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러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80년대에 접어들며 세대 의식이 한 층 자유로워지는 과도기가 찾아왔는데, 제가 그걸 겪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원색의 사용이 공통적으로 눈에 띄지만, 배경에 등장하는 상호나 광고, 혹은 사람들의 차림새 등을 보고 서로 다른 도시의 풍경이라는 게 유추 가능해요. 예를 들어 <지하철 다운타운행>(2010)이나 <U-Bahn 알렉산더 플라츠>(2015), 혹은 <뉴저지 스페인 버스>(2013-15)처럼요. 저마다의 특색을 가진 도시들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랄까요. 여행자로서, 작가로서 새로운 도시나 문화권을 접하실 때 보편성과 차이점 중 어떤 면을 더 주의 깊게 보시나요?
6-70프로는 보편성에 더 치우치는 것 같아요. 차이점을 굳이 부각하려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예를 들어, 호주, 독일, 그리고 미국 뉴욕의 경우 대중 시각 예술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달되어 있잖아요. 또, 도시마다 환경적인 부분에서 오는 특징적인 색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오는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맨해튼은 상대적으로 어두운 지하 공간이 많은 반면, 호주 같은 곳은 지하보다 지상 트램이 많고 도시가 상대적으로 위로 많이 노출된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다 보니 색채 자체가 더 밝고 쨍한 것 같아요. 반면 독일은 겨울이 길다 보니 무채색이 주조를 이루고요. 따로 의식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작업에 반영되지 않나 싶어요.
유달리 대중교통에 주목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해외에서는 제가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다는 점이 초기 작업에 영향을 많이 줬어요. 뉴욕에서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끊임없이 스케치를 했거든요. 이 도시에서 지하철의 존재는 움직이는 노동력을 공급 시키는 혈관 같다고 느껴져요.
도시 풍경을 그린다면 사람들이 없는 풍경을 그릴 수도 있는데, 작가님 작업에서는 늘 사람의 형상이 등장해요.
사람들이 저마다 생존하는 방식들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그 방식을 그린다기보다는 필연적으로 제가 특별하게 관찰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작가마다 본인이 가진 스킬, 혹은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이 다르다 보니 본인이 볼 수 있는 것 또한 달라지거든요. 저에게 가장 익숙하게 체화된 형식은 ‘그리기’예요. 그러다 보니 제가 어느 위치에서 제가 보는 걸 기록 할 수 있을지, 그 적절한 장소를 찾고 조건과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해지죠.
사람을 그리는 문제도 사람들을 보고 관찰하는 문제와 연관됩니다. 저의 경우, 추운 길거리에서는 그리기가 힘들어요.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적당한 거리가 확보되는 시간과 장소를 발견하면 스케치북에 그리기 시작해요. 수채화나 페인트로 옮기거나 급할 땐 사진을 찍기도 하고요. 그림 그리는 행위가 제 몸 속에 베어서 습관처럼 나오는 것 같아요. 그 습관이 자연스레 발현될 수 있는 조건에 몸을 갖다 놓는 데 시간을 많이 써요. 뉴욕에서는 두 달 반 동안 매일 브루클린과 맨해튼을 오가며 전철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출퇴근 시간이 지나고 보통 오전 10시 쯤이 되면 인파와 적당한 거리를 갖게 되고 공간이 확보돼요. 40분 정도에 1-2장을 매일 같이 그리고 있어요.
작가님께서 가진 작가로서의 특성들이 잘 발현될 수 있는 곳을 의식적으로 찾아 다니신다는 말씀이군요. 장소가 바뀌면 작업에 어떤 영향이 있나요?
심리적 공간이 작업에 반영된다고 할까요. 형태와 색채 등이 더 대담해지기도 하고, 밖에서 봤던 색채들이 자연스레 화면 속으로 들어오거나 눈에 계속 들어오는 색들을 선호하게 되기도 하고요. 미국에 머무는 지금은 공사현장 인근에서 쭉 지내다 보니 그림이 조금 대담해졌어요. 그림이라는 것은 캔버스에서 조형 형태를 바꾸는 건데 공간에서 끊임없이 재료가 변형되는 환경에 놓이니까 아무래도 제 작업에 그게 더 드러나더라고요.
조형 형태를 바꾼다는 말씀을 하셔서 생각이 난 건데, 회화 외에도 콜라주나 조각 작업들도 종종 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2020년 작업인 <약 먹는 남자>처럼요. 미국 우유 제품인 Organic Valley 우유갑이라던지 큐브치즈인 벨큐브 껍질이 사용된 작업들이 인상적이었어요.
네 맞아요. 예전부터 느꼈지만 미국은 포장지를 많이 쓰더라고요. 작은 델리 가게 종이 포장지나 음식을 싸는 은박지들을 애용한 콜라주 작업들을 자주 했었죠. 모두 도시에서 느낀 감각들을 기반으로 한 거예요. 여행을 할 때는 라면도 끼니 때우기 용으로 자주 먹게 되다 보니 라면 봉지 뒤에 있는 금속성 은지도 즐겨 쓰기도 했고요. 생활이 바뀌면 주변의 사물들과 만나는 방식도 바뀝니다.
작가님 작업들을 보며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건 초기 작업인 1980년 대부터 최근 작업까지 관심사가 일관적으로 꾸준히 등장을 한다는 점이에요. 역사 속 모티프나 도심 풍경과도 같이요. 동일한 대상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걸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있진 않으셨나요?
예전에는 그림 그리는 재료로는 물감이 당연했으니 큰 고민 없이 물감을 썼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물감의 의미가 더 커지는 것 같아요. 대상을 그리기 위해 물감을 쓴다기 보다 물감이 만들어지는 그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해진다고나 할까요. 회화라는 건 분말 안료를 평면에 붙이는 거잖아요. 안료만 갖다 놓으면 안되니 접착제로 캔버스에 안료를 붙이는 게 그림 그리는 행위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테크닉이 수반되는데 그 테크닉이 작가마다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점으로 빼곡하게 그린다거나 물감을 흩뿌린다거나 행위보다는 생각에 비중을 더 둔다거나 등등이요. 그런 면에서 안료를 만들어내는 행위,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를 통해서 작가의 태도를 읽어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 고민은 결국 우리는 그림을 왜 그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지더라고요. 왜 인간은 눈으로 본 걸 재현하려고 하는 걸까? 라는 궁극적인 질문이요.
다시 말해, 우리 주변의 사물과 우리의 관념이 연결되어있고, 그림이라는 전통은 그 재료 속에 이미 관념의 방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은 눈으로 본 것을 반드시 확인하려고 하는가라, 흥미로운 질문이에요. 예술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물음이네요.
저에게 시각예술이란 자기 존재의 확인이라고 생각돼요. 수 백 년에 걸쳐 사람들이 시각예술에 흥미를 가진 이유가 거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어요. 내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을 내가 보면서도, 인식을 하면서도 확실치가 않은 거예요. 저 역시 작가로 오랜 세월을 작업해왔지만 우리가 보는 현실과 캔버스 속 현실은 영원히 같을 수 없다고 느껴요. 다빈치, 피카소, 고흐 등 시대를 불문한 거장들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원하는 현실을 화면 안으로 가지고 오려고 했지만 결국 직접 본 현실과 모두 달랐던 것처럼요.
도시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건 자연에 있을 때보다 한층 복잡해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회적 관계에 의한 것인데 타인이 눈 앞에 지나갈 때면 본인만의 수많은 기준으로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판단하면서 보게 되거든요.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인지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매순간 우리에게 인식되는 시각적인 존재들의 형태를 파악하려는 건 결국 생존, 즉 삶의 문제와 직결되는 밀접한 연결 지점이라고 느낍니다.
인간 본연에는 내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혹은 지금 이 순간 경험하고 있는 것들의 진실성을 확인받고 싶은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는 말씀이네요. 불확실함에서 비롯한 무의식적인 불안감이 있다는 말로도 해석되고요. 자기 존재의 ‘확인’이라고 하셨을 때, 그 확신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인가요, 아니면 타인인가요?
바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러니까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다 보니 매일 늘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어요. 학교나 직장처럼요. 그런데 잠재적으로는 스스로가 파악하지 못한 현실의 존재가 우리의 무의식 중에 있어요. 비유하자면, 직장을 가는 길에 저 멀리 도로에 사고가 나서 누군가가 다친 걸 목격해도, 다친 누군가를 돕는 것 보다는 직장에 늦지 않게 가는 게 우선인 경우가 많죠. 또 다른 예로, 저 멀리 지구 어딘가에서 전쟁으로 인해 며칠 새에 수 천 명이 죽어 나갈 때, 누군가는 전선에서 함께 싸우고 희생자들을 구호하려고 할 때 당장의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다른 이들의 생사 문제보다는 당장의 내 목적지에 도달하느냐, 오늘을 살아내느냐가 중요한 상황인 거예요.
이런 순간들이 지속되면 몸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기력한 감정들이 쌓여간다고 생각해요. 매일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계속 쌓이고 있는 감정과 생각들을 남에게 공유하고 보여주고 싶은 욕구, 그게 저는 창작의 근원이라고 생각해요. 달리 말하면 매 순간 수없는 생각을 흘려 보내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 그게 바로 예술이라고 느낍니다.
서용선의 주요 개인전으로는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서울 아트선재센터, 2023), 《통증·징후·증세: 서용선의 역사 그리기》(파주 아트센터화이트블럭, 2019), 그리고 《서용선의 도시 그리기: 유토피즘과 그 현실 사이》(서울 금호미술관/학고재갤러리, 2015) 등이 있다. 그의 작업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그리고 싱가폴 우관중 미술관 등 국내외 유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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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위해 연락을 드렸을 때 마침 뉴욕에 계시다고 해서 정말 반가웠어요. 뉴욕에 자주 오시나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여행도 하고 작업도 할 겸 종종 와요. 맨해튼에서 델리를 운영하시는 한국인 분을 우연히 알게 됐는데, 델리 인접한 곳에 있는 여유 공간을 흔쾌히 내주셔서 그곳에서 작업하는 중이에요. 낮에는 주로 할렘 쪽에 있고 저녁에 맨해튼으로 내려와서 지내요. 할렘에서는 때마침 오랫동안 가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국인 부부가 작업실을 내어 주셔서요. 치안도 나쁘지 않고, 무엇보다 미드타운과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라 흥미로워요. 낮과 오후 시간대는 주로 그 쪽에서 작업을 하고 저녁에는 도심 쪽으로 내려와서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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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뉴욕, 시드니 등 세계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시면서 작업하신 <도시>시리즈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걸로 알고 있는데, 도시에 대한 애정이 아직까지 크신 것 같아요. 작가님 작업들을 보면 거리를 걷고 있는 인물들, 혹은 대중교통을 타고 있는 인물들 등 그 소주제는 다를지 언정 도심 속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네, 전 도시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걸 보는 게 참 즐거워요. 특히 전 대도시 속 삶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요. 뉴욕 맨해튼의 경우는 세계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욱 다양성이 두드러지는 곳이잖아요. 인간, 인종, 민족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일종의 호기심을 주는 곳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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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시리즈에서 가장 먼저 제 눈에 띄는 부분은 색채에요. 익숙하고 평온한 일상의 풍경들이지만 <도시-차 안에서>(1998, 1991)나 <봉천동-사당동>(1995), 최근에 와서는 <34th Street>(2010)이나 <14가 출구>(2010) 에 이르기까지 원색 사용들이 특징적이에요. 붓터치나 인물들의 표정들과도 더해져 전반적으로 강렬하고 러프한 느낌이 든다랄까요. 강한 원색들을 위주로 사용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도시> 시리즈는 80년대 서울에서 처음 시작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인 70년대 후반만 해도 종로 거리에 가면 간판들에 검정색 글씨들이 빼곡했어요. 흑백이 주조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러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컬러가 많이 쓰이기 시작했어요. 그 때부터 컬러 텔레비전이 도입되기 시작했거든요.
오랫동안 한국의 도시들을 관찰하며 느낀 건 한국은 역사적으로 색채 사용에 있어서 보수적인 면이 있다는 점이에요. 몇 백 년 동안 유교 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가며 집단 속에서 (개인이) 돋보이는 게 억제되기도 했고, 서화 역시 먹을 중심으로 발달했잖아요. 유교에서는 수묵 중심의 산수화가 장려되다 보니 단조로운 색채의 사용이 마치 오랜 관습처럼 굳어버린 셈이죠. 제가 학교 다닐 때도 동양화에 밝은 색채를 쓰면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러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80년대에 접어들며 세대 의식이 한 층 자유로워지는 과도기가 찾아왔는데, 제가 그걸 겪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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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의 사용이 공통적으로 눈에 띄지만, 배경에 등장하는 상호나 광고, 혹은 사람들의 차림새 등을 보고 서로 다른 도시의 풍경이라는 게 유추 가능해요. 예를 들어 <지하철 다운타운행>(2010)이나 <U-Bahn 알렉산더 플라츠>(2015), 혹은 <뉴저지 스페인 버스>(2013-15)처럼요. 저마다의 특색을 가진 도시들을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다랄까요. 여행자로서, 작가로서 새로운 도시나 문화권을 접하실 때 보편성과 차이점 중 어떤 면을 더 주의 깊게 보시나요?
6-70프로는 보편성에 더 치우치는 것 같아요. 차이점을 굳이 부각하려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예를 들어, 호주, 독일, 그리고 미국 뉴욕의 경우 대중 시각 예술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달되어 있잖아요. 또, 도시마다 환경적인 부분에서 오는 특징적인 색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오는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맨해튼은 상대적으로 어두운 지하 공간이 많은 반면, 호주 같은 곳은 지하보다 지상 트램이 많고 도시가 상대적으로 위로 많이 노출된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다 보니 색채 자체가 더 밝고 쨍한 것 같아요. 반면 독일은 겨울이 길다 보니 무채색이 주조를 이루고요. 따로 의식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작업에 반영되지 않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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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리 대중교통에 주목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해외에서는 제가 차를 타고 다니지 않는다는 점이 초기 작업에 영향을 많이 줬어요. 뉴욕에서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끊임없이 스케치를 했거든요. 이 도시에서 지하철의 존재는 움직이는 노동력을 공급 시키는 혈관 같다고 느껴져요.
도시 풍경을 그린다면 사람들이 없는 풍경을 그릴 수도 있는데, 작가님 작업에서는 늘 사람의 형상이 등장해요.
사람들이 저마다 생존하는 방식들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그 방식을 그린다기보다는 필연적으로 제가 특별하게 관찰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작가마다 본인이 가진 스킬, 혹은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이 다르다 보니 본인이 볼 수 있는 것 또한 달라지거든요. 저에게 가장 익숙하게 체화된 형식은 ‘그리기’예요. 그러다 보니 제가 어느 위치에서 제가 보는 걸 기록 할 수 있을지, 그 적절한 장소를 찾고 조건과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해지죠.
사람을 그리는 문제도 사람들을 보고 관찰하는 문제와 연관됩니다. 저의 경우, 추운 길거리에서는 그리기가 힘들어요. 그리고자 하는 대상과 적당한 거리가 확보되는 시간과 장소를 발견하면 스케치북에 그리기 시작해요. 수채화나 페인트로 옮기거나 급할 땐 사진을 찍기도 하고요. 그림 그리는 행위가 제 몸 속에 베어서 습관처럼 나오는 것 같아요. 그 습관이 자연스레 발현될 수 있는 조건에 몸을 갖다 놓는 데 시간을 많이 써요. 뉴욕에서는 두 달 반 동안 매일 브루클린과 맨해튼을 오가며 전철에서 그림을 그렸어요. 출퇴근 시간이 지나고 보통 오전 10시 쯤이 되면 인파와 적당한 거리를 갖게 되고 공간이 확보돼요. 40분 정도에 1-2장을 매일 같이 그리고 있어요.
작가님께서 가진 작가로서의 특성들이 잘 발현될 수 있는 곳을 의식적으로 찾아 다니신다는 말씀이군요. 장소가 바뀌면 작업에 어떤 영향이 있나요?
심리적 공간이 작업에 반영된다고 할까요. 형태와 색채 등이 더 대담해지기도 하고, 밖에서 봤던 색채들이 자연스레 화면 속으로 들어오거나 눈에 계속 들어오는 색들을 선호하게 되기도 하고요. 미국에 머무는 지금은 공사현장 인근에서 쭉 지내다 보니 그림이 조금 대담해졌어요. 그림이라는 것은 캔버스에서 조형 형태를 바꾸는 건데 공간에서 끊임없이 재료가 변형되는 환경에 놓이니까 아무래도 제 작업에 그게 더 드러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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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 형태를 바꾼다는 말씀을 하셔서 생각이 난 건데, 회화 외에도 콜라주나 조각 작업들도 종종 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2020년 작업인 <약 먹는 남자>처럼요. 미국 우유 제품인 Organic Valley 우유갑이라던지 큐브치즈인 벨큐브 껍질이 사용된 작업들이 인상적이었어요.
네 맞아요. 예전부터 느꼈지만 미국은 포장지를 많이 쓰더라고요. 작은 델리 가게 종이 포장지나 음식을 싸는 은박지들을 애용한 콜라주 작업들을 자주 했었죠. 모두 도시에서 느낀 감각들을 기반으로 한 거예요. 여행을 할 때는 라면도 끼니 때우기 용으로 자주 먹게 되다 보니 라면 봉지 뒤에 있는 금속성 은지도 즐겨 쓰기도 했고요. 생활이 바뀌면 주변의 사물들과 만나는 방식도 바뀝니다.
작가님 작업들을 보며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건 초기 작업인 1980년 대부터 최근 작업까지 관심사가 일관적으로 꾸준히 등장을 한다는 점이에요. 역사 속 모티프나 도심 풍경과도 같이요. 동일한 대상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걸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있진 않으셨나요?
예전에는 그림 그리는 재료로는 물감이 당연했으니 큰 고민 없이 물감을 썼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물감의 의미가 더 커지는 것 같아요. 대상을 그리기 위해 물감을 쓴다기 보다 물감이 만들어지는 그 과정 자체가 더 중요해진다고나 할까요. 회화라는 건 분말 안료를 평면에 붙이는 거잖아요. 안료만 갖다 놓으면 안되니 접착제로 캔버스에 안료를 붙이는 게 그림 그리는 행위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테크닉이 수반되는데 그 테크닉이 작가마다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점으로 빼곡하게 그린다거나 물감을 흩뿌린다거나 행위보다는 생각에 비중을 더 둔다거나 등등이요. 그런 면에서 안료를 만들어내는 행위,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를 통해서 작가의 태도를 읽어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 고민은 결국 우리는 그림을 왜 그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지더라고요. 왜 인간은 눈으로 본 걸 재현하려고 하는 걸까? 라는 궁극적인 질문이요.
다시 말해, 우리 주변의 사물과 우리의 관념이 연결되어있고, 그림이라는 전통은 그 재료 속에 이미 관념의 방향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은 눈으로 본 것을 반드시 확인하려고 하는가라, 흥미로운 질문이에요. 예술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물음이네요.
저에게 시각예술이란 자기 존재의 확인이라고 생각돼요. 수 백 년에 걸쳐 사람들이 시각예술에 흥미를 가진 이유가 거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어요. 내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을 내가 보면서도, 인식을 하면서도 확실치가 않은 거예요. 저 역시 작가로 오랜 세월을 작업해왔지만 우리가 보는 현실과 캔버스 속 현실은 영원히 같을 수 없다고 느껴요. 다빈치, 피카소, 고흐 등 시대를 불문한 거장들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원하는 현실을 화면 안으로 가지고 오려고 했지만 결국 직접 본 현실과 모두 달랐던 것처럼요.
도시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건 자연에 있을 때보다 한층 복잡해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회적 관계에 의한 것인데 타인이 눈 앞에 지나갈 때면 본인만의 수많은 기준으로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판단하면서 보게 되거든요.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인지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매순간 우리에게 인식되는 시각적인 존재들의 형태를 파악하려는 건 결국 생존, 즉 삶의 문제와 직결되는 밀접한 연결 지점이라고 느낍니다.
인간 본연에는 내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혹은 지금 이 순간 경험하고 있는 것들의 진실성을 확인받고 싶은 욕구가 내재되어 있다는 말씀이네요. 불확실함에서 비롯한 무의식적인 불안감이 있다는 말로도 해석되고요. 자기 존재의 ‘확인’이라고 하셨을 때, 그 확신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인가요, 아니면 타인인가요?
바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러니까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다 보니 매일 늘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어요. 학교나 직장처럼요. 그런데 잠재적으로는 스스로가 파악하지 못한 현실의 존재가 우리의 무의식 중에 있어요. 비유하자면, 직장을 가는 길에 저 멀리 도로에 사고가 나서 누군가가 다친 걸 목격해도, 다친 누군가를 돕는 것 보다는 직장에 늦지 않게 가는 게 우선인 경우가 많죠. 또 다른 예로, 저 멀리 지구 어딘가에서 전쟁으로 인해 며칠 새에 수 천 명이 죽어 나갈 때, 누군가는 전선에서 함께 싸우고 희생자들을 구호하려고 할 때 당장의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다른 이들의 생사 문제보다는 당장의 내 목적지에 도달하느냐, 오늘을 살아내느냐가 중요한 상황인 거예요.
이런 순간들이 지속되면 몸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기력한 감정들이 쌓여간다고 생각해요. 매일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계속 쌓이고 있는 감정과 생각들을 남에게 공유하고 보여주고 싶은 욕구, 그게 저는 창작의 근원이라고 생각해요. 달리 말하면 매 순간 수없는 생각을 흘려 보내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 그게 바로 예술이라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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