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유 연 (b. 1985)

“생경에 관하여”

EN/KO


Released on 11 Sep 2023
Featured in e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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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연은 최근 제58회 카네기 인터내셔널에 3명의 한국 작가 중 한 명으로 참여하며 당당히 해외 무대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런던 기반의 스테판 프리드먼 갤러리(Stephen Friedman Gallery)와 전속계약을 맺고 로스 앤젤레스의 나이트 갤러리(Night Gallery)에서 개인전을 선보이는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활동하는 무대의 반경은 넓어졌지만, 양유연의 작업에서 다루어지는 정서와 시선의 간격은 그가 작업을 시작했던 초기와 변함없이 우리의 존재와 일상에 맞닿아있다. 그의 작업은 울산시립미술관(2023); 청주 국립현대미술관(2019); 서울 아마도 예술 공간(2019); 서울 두산갤러리(2018); 서울 아르코미술관(2017)  등을 통해 선보여진 바 있다.

래이더는 현재 서울 프라이머리 프랙티스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그 사이에서 빛난 후⟫를 통해 총 여덟 점의 신작과 함께 돌아온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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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부터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현재까지 작업을 해오시며 질료나 소재에 있어 변화한 지점이 있었나요?


재료로는 지속적으로 장지를 다루어 왔고 물감은 중간에 변화가 있었어요. 전통 재료인 분채를 사용하다가 2010년을 기점으로 아크릴로 바꾸었거든요. 학부와 대학원 때는 다루는 소재가 조금 달랐어요. 학생 시절에는 제 머리 속이나 꿈 속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했다면 졸업 이후로는 현실에서 직접 본 이미지들을 대변하기 시작했어요. 2018년 즈음까지는 매스 미디어 등을 통해 접한 정치적인 순간들을 화면에 가지고 온다거나 경험한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은유적으로 그려내는 작업의 비중이 컸죠. 그 이후로  미디어에 노출된 이미지를 다루는 것이 더 이상 나 자신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작업에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했어요. 제 삶에서 제가 보고 느낀 것들을 화면에서 다루어보자라고 결심했고요. 그렇게 내 눈 앞에 존재하는 빛, 어둠 등의 소재에 집중한 작업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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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개인으로 소재의 초점이 옮겨지게 되었다는 말씀이시네요. 과거에 비해 현재 개인의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사실 대학원을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림을 그리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관심사가 없었어요. 또 제 삶 자체가 온전히 저의 의지와 개인적인 동력으로 인해 움직인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런데 (졸업 이후) 경제 활동의 필요성을 더 체감하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발을 내딛게 되면서 ‘나라는 개인의 존재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사회의 영향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깨달음과 동시에 제가 그 때까지 가지고 있던 일종의 무지함에 대해 반성과 분노도 함께 일었어요. 여러 변화들로 감정의 형태가 부풀어 있던 시기였던 만큼, 그림에 그러한 개인적인 감정과 생각들을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늘 ‘지는 마음’으로 작업한다고 생각하곤 해요. ‘진다’는 것이 승패의 개념에서의 지는 것이 될 수도, 해가 질 때의 진다의 뜻이 될 수도 있어요. 사회 구성원으로서, 또 개인으로서 살아가며 제 삶에서 여러 형태로 느껴지는 무력감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셈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인 소재들보다는 제 개인의 감정에 귀 기울이고, 거기서 느껴지는 무력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집중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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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들을 화면에 가지고 온다고 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 지점을 연결하셨나요?

습관적으로 평소에 사진을 통해 일상을 기록해요.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들을 바로 직접 찍거나 미디어에서 마주치게 되는 사진을 틈틈이 보관하는 방식으로요. 한동안 여러 사건으로 대한민국 사회가 어지러울 때 직접 분노하고 현장에 가는 사건들이 많았어요. 시위 현장에 직접 나가서 사진을 찍어 오거나 그 현장을 생중계 해주는 방송들, 혹은 보도자료들로부터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습니다.  차용한 이미지들을 최대한 원본 이미지가 느껴지지 않게 변형을 많이 해서 활용했어요.  또 직접 본 장면들을 찍은 사진들을 참고해서 작업할 때도 원본의 이미지를 많이 변형합니다.


원본 이미지를 없애고 변형한다는 것은 속에 담긴 인물과 사건의 특수성을 없애고 보편화 익명화한다는 것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사진을 그려냈을 때 참고가 된 사건이 일차적으로 상기되는 걸 지양하고 싶었어요. 계속해서 화면을 바라보고 읽어냈을 때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거나 제목을 통해 상황을 유추하는 등 관람객만의 주관적인 해석이 이입되기를 바랐다랄까요. 지시적으로, 혹은 선동적으로 그 이미지가 그대로 화면에서 보여지는 건 원치 않았어요. 무엇보다 작업할 때 보는 이로 하여금 생경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요. 그런데 보도자료는 그 특성상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된 이미지다 보니 변형을 통해서만 비로소 그 생경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신체나 얼굴의 일부가 크롭 확대된 구도의 작업들이 흥미로워요. 마치 갑작스레 찍혀버린 사진처럼 사건 전체에서 분절된 순간만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랄까요.

그러한 구도는 2010년을 기점으로 작업 방식에 변화를 주었을 때 시작했던 방식이에요. 우선 보는 이들이 화면을 봤을 때 확대된 그림들이 어떤 소재나 상황인지 한눈에 유추되지 않았으면 했어요. 보는 이가 계속 화면을 들여다보며 이게 무슨 상황일까, 혹은 무엇이 그려진 걸까와 같은 의문을 던지고 그 정체를 의심하게 되는 과정을 보고 싶었어요. 손을 확대해서 주름만 보이게 하거나, 상처를 확대해서 상처인지 구멍인지 모호하게 하거나 말이죠. 생경한 이미지 전달을 위해 기성의 구도나 소재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요. 사진을 기반으로 그리다 보니 인물의 정체성이 두드러지기를 원하지 않는 부분도 있었어요. 인물의 형상이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신체나 얼굴의 일부만을 크롭하여 그 인물이 가진 정서에만 집중이 되는 화면을 구성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님 작업에서 여겨 하나의 특징은 전시의 제목이에요. 《한낮에 꾸는 꿈》(2012)이나  《그들의 우네》(2014)에서  《날이 밝을 것을 알고 있다》(2019) 이번 개인전인 《그 사이에서 빛난 후》(2023) 이르기까지, 때마다의 전시 제목을 통해 작가님이 시기에 느끼셨 정서의 흐름이 느껴지는 듯해요.

저는 작품 제목과 전시 제목을 매우 중시하는 편이에요. 제목을 지정할 때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함축적으로 포함하는 단어와 문장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일기나 작가 노트를 참고하거나 이전에 적어 놓았던 문장을 변형한다든가, 책에서 인상깊은 부분을 발췌해서 내 문장으로 만든다거나 해서요. 저에게는 저 개인의 삶이나 생각이 작업에 반영되는 게 너무 중요한 작업이라 제목만 보아도 제 삶의 흐름이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요.
   



여름, 각각 영국과 미국에서의 개인전이기도 했던 Passing Time⟫(스테판 프리드먼 갤러리, 2023) Stranger(나이트 갤러리, 2023)는 이전 전시들과 달리 영문 제목의 개인전이라 신선한 느낌이 들었어요. 작가님 작업에서 제목이 중요한 요소인 만큼, 다른 언어로 제목을 선정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경험이었을 같아요.

영어권에서 활동했던 적이 없었던 지라 줄곧 작품과 전시 제목들은 모두 한국어로 작명해 왔었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는 영문 제목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서 영문으로 의미를 담는 법을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죠.  그 과정에서 한글에서 찾지 못한 단어가 나온다거나 영어를 통해 포괄적인 의미를 전할 수 있게 되는 경우도 있어서 이제는 긍정적으로 함께 고려하는 편이에요.

‘Passing time’과 ‘Stranger’ 모두 처음에 영문명만 염두에 두었던 제목들이에요. ‘Passing time’은 2022년에 작업했던 작품의 제목으로, 병원에서 어머니가 입원하셨을 때 병간호를 하면서 찍었던 어머니의 손 사진에서 비롯된 작업이고요. 새벽에 병간호를 하면서 잠이 오지 않아 누워만 있는 상황에서 엄마의 손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었었어요. 문득 병간호 때 내가 한 것은 하염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흘러가는 시간과 그걸 보고 있다는 것을 제목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국문은 아니지만 전시의 방향성이나 제가 원하는 것을 포괄적으로 전달하는데 적절하다고 판단되어서 결정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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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ing time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작업은 <Translucent 1>(2022-23) <Translucent 2>(2022)에 등장하는 마네킹이에요. 이전 작업들에도 마네킹이 종종 등장했었지만 해당 전시에서는 전과 다르게 제목처럼 투명한 형태로 등장을 하더라고요. 변화를 주신 이유가 있나요?

마네킹은 2016년에 갤러리 룩스에서 열린 ⟪불신과 맹신⟫전에서 주로 다루었던 소재였어요. 인물과 관련된 정서를 다른 대리물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 떠올린 소재이기도 했고요. 그 때 당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제가 알고 있다고 느꼈던 대상을 향한 의심과 불확실함에 대해 고민이 컸던 시기였어요. 신뢰했던 대상이 불신의 대상으로 바뀌었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과 배신감, 그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왔을 때 느껴지는 공포감과 기이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마네킹이 그러한 감정을 투영하는 어떠한 면에서 적절했나요?

마네킹이라는 존재가 상점의 진열장이나 백화점처럼 일상에서 익숙한 곳에서 마주쳤을 때 괴리감이나 불쾌감이 느껴지는 대상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 존재를 맞닥뜨릴 때면 공포감이 배가되면서 그 대상 자체에 대해 의심이 생긴다고 느꼈어요. 그러면서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놓인 마네킹들을 한동안 찾아다니며 열심히 그렸었어요. 그러다 소재의 한계가 느껴지는 지점이 생겨 그리기를 멈췄다가 작년쯤, 집 앞에서 우연히 버려진 투명 마네킹을 보게 된 거예요. 때마침 시각적으로 왜곡되고 흔들리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 투명 마네킹이 눈앞에 있으니 이상한 기시감이 들더라고요. 사진 등을 통해 기록을 많이 남기면서 자연스레 화면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 같아요. 투명한 표면을 통해 비치는 내외부의 풍경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목이 잘린 인간의 형상을 한 대리물이 숲길에 버려진 상황 등이 인상적이었어요. 의외로 런던에서의 개인전 때 관객분들의 반응이 좋아서 기억에 남는 작업이기도 해요.

 

장지를 사용하시는 것과 이곳에서의 일상에서 비롯된 소재들을 차용하신다는 점에서 작가님의 작업이 한국 사회의 특수성과 연결된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작년 제 58회 카네기 인터내셔널을 기점으로 해외무대에서  작가님의 작업이 큰 호응을 받는 모습을 보며, 작가님의 작업을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의 시선에서 읽어내는 계기가 되었어요.

맞아요, 결국에는 내가 여기서 겪은 일들과 그로부터 파생된 감정들이 한국인 혹은 한국 사회만의 특수성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느껴서 반가웠어요.  제가 다루고 있는 질료가 전통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전공에서 기인한 특수성만으로 제 작업을 다루는 것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동양화라는 제 전공과 제가 다루는 질료를 연결시켜 해석하는 시선들은 늘 있었지만 정작 내용과 질료를 엮어 해석하려는 시도는 많지 않았거든요. 해외에서는 저의 전공 등에 의해서 생기는 작업 외적인 특수성에 주목하는 것보다 선입견 없이 저의 작업만을 바라봐주는 느낌이 들어요.




활동 무대가 넓어지시면서 한창 바쁘실 것으로 예상되는데, 요즘 고민되는 지점이 있으신가요?

물리적인 차원에서 우선 다루는 재료 자체가 연약한 재질의 장지인 데다 전시 방식도 장지가 그대로 노출되는 설치를 많이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고민이 많아요. 장지를 전체적으로 감싸는 지지대 없이 설치가 되다 보니 아무래도 일반적인 패널 작업보다 더 훼손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현재의 설치 방식과 질료를 과연 계속 가지고 나갈 것인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환경에서 작품을 보관 및 전시할 수 있는지에 대해 꾸준히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그의 최근 개인전 ⟪그 사이에서 빛난 후⟫는 프라이머리 프랙티스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전시에 관한 더 많은 정보는 다음 사이트에서 확인 가능하다: http://primarypractice.kr/exhib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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